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경 전투 (문단 편집) ==== 루프레히트의 반격 ==== ||[[파일:attachment/페르디낭 포슈/rupprecht.jpg|width=250]][br]독일 제6군 사령관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위대한 모르주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지만 전략적인 이득이 전무하다는 평을 듣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JB10_%E2%80%93_Krafft_von_Dellmensingen.jpg|width=310]][br]독일 제6군과 제7군의 참모장 '''[[콘타르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크라프트]]'''[* 제6군과 제7군의 경우에는 같은 방면을 담당했기에 하나의 참모단 아래에 통일된 상황이었다.] || 독일군의 최초 의도는 메츠(Metz)와 낭시(Nancy)의 동쪽 부근에 묶어두는 것이었지만 몰트케(大)의 명언 "어떤 계획이더라도 적군과의 접촉 후 살아남을 수 없다"(No plan survives contact with the enemy)라는 말답게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진행 점점 폐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제6군이 너무 빡빡하게 제1군과 제2군의 진군을 저항하는 바람에 전황은 본래대로 자루처럼 고립시키는 계획과 점점 멀어진데다가 제6군 사령관 루프레히트가 검은 숲(Black Forest)으로 프랑스군을 유인하는데 별 거부감이 없던 반면[* Holger Herwig의 에 의하면 오히려 '''적극적'''(more than willing)이었다고 한다. 원문에는 추가설명이 없지만 루프레히트가 '''프로이센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인 만큼 프로이센의 영토를 포기하는데 별 거부감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군 총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줄여서 OHL)는 프랑스군에게 독일 영토를 내주는데 큰 거부감을 보였다.[* 독일군의 철수계획을 보면 개소리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독일군이 포기한 영토는 어디까지나 [[알자스-로렌]]에 국한되었다. 그에 비해 검은 숲은 독일 본토의 일부라 이를 포기한다는 뜻은 알자스-로렌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 독일군은 프랑스의 22개의 현역 군단 중 무려 18개 군단이 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오판했는데, 루프레히트는 교전을 통해 실제로는 그 절반 가량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헬리머(Helimer)에 새로이 사령부를 차린 루프레히트와 제6군 참모장 크라프트(Krafft)는 적군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방어가 아닌 강력한 반격을 퍼붓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루프레히트는 반격작전에 대해 지지를 받기 위해 제7군의 폰 헤링겐에게 폰 질렌더(von Xylander) 중령을 파견 보냈으나 폰 헤링겐은 냉담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에서는 폰 질렌더를 아예 '''외교 사절단'''(diplomatic mission)과 비유하며 서술한다. 제6군은 병사, 장교, 지휘관마저 바이에른인으로 구성된 거의 바이에른군과 같은 모습을 보였는데, 크라프트는 폰 헤링겐의 냉담을 프로이센인의 바이에른인에 대한 차별로 해석해 격분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루프레히트는 독일 총사령부에도 반격작전에 대해 알렸으나 총사령부도 딱히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루프레히트는 OHL의 주요 장교들과 통화 및 회담을 통해 반격작전을 강력히 주장했고, [[임무형 지휘체계]]로 상징되듯이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하는 독일군답게, [* 폰 몰트케(小)는 삼촌 폰 몰트케(大)의 느슨한 지휘 스타일을 [[벤치마킹]]했으나 군단 단위의 병력을 지휘했던 삼촌과 달리 몰트케(小)는 7개의 군을 동시에 지휘하는만큼 난이도나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랐다.] 8월 18일 오후, 크라프트는 총사령부의 병참감인 폰 슈타인으로부터 '''OHL은 공격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6군은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야 한다. 그에 대한 책임은 당신들에게 있다'''는 대답을 받아내었다. 제6군과 제7군은 8월 20일에 반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ench_withdrawl_in_Lorraine_20_23_august_1914.jpg]][br]독일군의 반격끝에 제대로 밀려나가는 제2군과 제1군 || 8월 '''20일'''[* 상술했듯이, 조프르가 메시미에게 성과가 좋다고 보고한 날이다.] 4:30AM, 프랑스군의 공세에 빡빡한 저항 끝에 후퇴하던 전날과 달리 제6군은 강렬한 포격세례와 함께 반격을 취해 100km 넓이 전선에서 제2군과 격돌해 일명 모르주 전투(Battle of Morhang, 혹은 자르 전투-Battle of the Saar)가 터졌다. 보주(Vosges)산맥에서 격돌한 두 군의 치열한 교전은 난전으로 발전했다. 야포마저 경시해 보병돌격 위주의 교리를 자랑하는 프랑스군과 달리 강력한 중포를 동원한 제6군은 기습당한 프랑스군에 끔찍한 피해를 입히며 우위를 점했다. 제2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격한 포슈의 제20군단은 아예 모르주를 향해 '''[[닥돌|냅다 찔렀는데]]''' 이는 전날에 공세를 이웃군단에게 맡기고 방어를 굳건히 하라는 카스텔노의 명령를 어기는 행위였다.[* [[페르디낭 포슈]]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전후 상당한 논란으로 발전했다. 포슈는 카스텔노의 명령을 듣지 못했다고 주장한 반면, 카스텔노는 그럴 리가 없다며 포슈를 통렬히 비판했다.] 강력한 적에게 공세를 퍼붓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제20군단이 너무 많이 진격한 나머지, 제2군의 중앙 군단들의 측면을 노출해버렸다. 바이에른 제8군단은 중포를 동원해 이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제20군단 또한 독일 제3군단의 기관총 세례에 큰 피해를 입었다. 오후에 접어들자, 교전에서 독일군이 확연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중포를 정밀히 조준해 프랑스 야포를 제거한 후 보병돌격을 명했는데, 이로써 카스텔노는 전투에서 아들[* 카스텔노는 국경전투로 인해 '''총 3명'''의 아들을 잃는다.]뿐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야포를 상실했다. 이로써 독일군의 맹공에 제15군단과 제16군단은 패퇴했으며, 제20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패전을 목격한 한 장교에 의하면: >"'''이는 감탄할 만한'''(sublime) '''혼란이었다.''' 보병, 포병과 그들 특유의 느릿느릿 마차, 군수물, 물품 보관소, 우리 매우 뛰어난(brilliant) 참모단의 매우 깔끔한(brilliant) 자동차는 서로를 격돌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cb48c300eeb72040ad38365149842bd.jpg]][br]프랑스 제20군단의 사령관[br]'''[[페르디낭 포슈]]'''[* 전후 명장으로 칭송받지만 아직은 현대전을 학습하는 구시대의 지휘관이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ugustin_Dubail.jpg|width=230]][br]프랑스 제1군의 사령관[br]'''오귀스트 뒤바이'''[* 본인은 그리 무능한 편이 아니지만 후일 [[베르됭 전투]] 등 온갖 역경을 맞이한다.] || 제2군 입장에선 끔찍한 상황이라 할 수 있으나, 유일하게 교전이 가능할 정도의 전력과 예비대를 보존한 포슈의 제20군단은 샤토-살랭스를 사수해 타군단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제6군의 공세를 '''일시적으로 막아 세워''' 제2군이 잠시나마 후퇴할 만한 시간을 벌었다.[* 일전까지 지휘에 미숙해 전후 [[명장]]으로의 명성과 달리 자주 사고치던 포슈의 첫번째 제대로 공로에 포슈 신화의 첫번째 장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다. 로렌 공세에서 포슈의 공로에 대해 상당히 갈리는 편인데,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는 성급한 공세를 비판하고,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는 자력으로 제6군을 막아세운 공로를 찬양한다.] 간혹 언급되는 듯이 기적이라 할만한 성과가 아닐지여도, 붕괴하던 제2군이 그나마 후퇴할 시간을 벌어준 포슈의 지휘력과 판단력은 상당한 편이다. 그리고 제2군이 패퇴당한 바람에 제1군의 측면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제1군의 성과에 제동을 걸었다. 뒤늦게 참전한[* 20일 10AM에야 참전했다고 한다.] 헤링겐의 제7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데다가 공격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뒤바이는 제2군의 패배에 개의치 않고 공세를 지속하려 했으나 조프르는 제2군이 완전히 후퇴할 시에는 제1군이 우회당할 위협이 있다고 경고했다. 어쩔 수 없이 뒤바이는 제8군단과 제13군단을 파견보내 제2군의 측면을 보호하면서 제1군의 후퇴를 명했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80b50203b2594a1ad91c2aca5a2b03e.jpg|width=250&height=350&align=center]][br]로렌 공세 과정에서 죽은 프랑스 병사의 무덤 || 21일에 공세를 재개한 제6군은 후퇴하는 제2군에 강력한 포격세례로 맞이했다. 포슈의 제39보병사단은 샤토-살랭스로 밀려나갔으며 제11보병사단은 아예 패퇴당했다. 제6군은 이미 후퇴하던 제15군단과 제16군단을 또 다시 공격했는데, 이로써 두 군단은 완전히 붕괴했다. 더욱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던 카스텔노는 또 다시 전면후퇴를 명했으며, 제1군의 뒤바이 또한 뫼르트(Meurthe)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조프르는 이 패배를 최대한 축소하려 노력했지만 모르주 전투에서 제15군단의 사상자를 끝없는 마차로 나르는 꼴을 똑똑히 목격한 민간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널리 퍼진 바람에 별 소용이 없었다. 20일에 터진 모르주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피해는 매우 끔찍한 수준이였다. * 바이에른 제1군단은 '''1,900명'''의 포로를 보고했다. * 바이에른 제2군단은 '''800명'''의 포로를 보고했다. * 바이에른 제3군단은 '''1,300명'''의 포로를 보고했다. * 독일군의 매장 기록에 의하면 '''1,200명'''의 프랑스군을 묻었다. * 독일군 총사령부에 보고된 바로는 포로 '''14,000 명''', 화기 13 개를 노획했다. 프랑스군은 전후 한 5,000명의 사상자를 실토했지만 역사가들은 거의 2배의 '''10,000'''명의 사상자를 추정한다고 한다. 빌헬름 2세는 이 승리를 두고 매우 기뻐해 '''"군사역사상 최고의 승리"'''(The greatest victory in the history of warfare)라 칭송했다. 이로써 로레인 공세는 프랑스군의 총 3개의 공세중 불명예스러운 1패를 기록했다. 이제 나머지 2패가 기다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